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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

마틴 루터 킹의 옥중 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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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의 옥중서신

당신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에는 동의하나 직접적인 행동방식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부모님이라도 되는 양, 다른 사람의 당연한 권리에 대해 시기상조를 논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치 절대적인 시기라는 것이 존재라도 하듯이 "좀더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흑인들더러 기다리라고 조언합니다. 악의를 가진 사람들의 절대적 몰이해보다 더 힘빠지는 것은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어설픈 이해입니다.

"I agree with you in the goal you seek, but I cannot agree with your methods of direct action"; who paternalistically believes he can set the timetable for another man's freedom; who lives by a mythical concept of time and who constantly advises the Negro to wait for a "more convenient season." Shallow understanding from people of good will is more frustrating than absolute misunderstanding from people of ill will."

혹자는 질문할지 모른다. 왜 쓸데없이 직접적인 행동을 하느냐고. 왜 점거농성을 하고 퍼레이드를 하느냐고. 사회적 합의가 더 좋은 방법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행동들의 목적이 바로 사회적 합의이다. 비폭력적인 하지만 직접적인 행동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서 사회적 합의를 끈덕지게 거부해 왔던 공동체를 더 이상 사안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고 직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비폭력적 저항의 목적이 긴장 조성이라는 내 말에 경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나는 긴장이라는 단어를 겁내지 않는다. 나는 진심으로 폭력적인 긴장을 반대해왔으나, 건설적이고 비폭력적인 긴장이 없이는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룰 수 없다.

You may well ask: "Why direct action? Why sit ins, marches and so forth? Isn't negotiation a better path?" You are quite right in calling for negotiation. Indeed, this is the very purpose of direct action. Nonviolent direct action seeks to create such a crisis and foster such a tension that a community which has constantly refused to negotiate is forced to confront the issue. It seeks so to dramatize the issue that it can no longer be ignored. My citing the creation of tension as part of the work of the nonviolent resister may sound rather shocking. But I must confess that I am not afraid of the word "tension." I have earnestly opposed violent tension, but there is a type of constructive, nonviolent tension which is necessary for growth.


우리가 평화적으로 행동하더라도, 그 행동이 충돌을 유발한다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요.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가요? 강도라는 악행이 유발된 것에 대해, 돈을 많이 가진 탓을 할 건가요. 소크라테스가 결국 독배를 마시게 된 것은 끈질긴 진리 추구와 철학적 탐구로 시민들을 성가시게 만든 본인 탓으로 돌리고, 십자가 고난과 박해라는 죄를 인류가 저지르도록 만든 책임은 그리스도 자신의 창조주 신과의 교감과 신의 뜻에 대한 끝없는 헌신 탓으로 돌려야 하겠군요. 비록 그러한 행동이 폭력을 자극한다 할지라도 그 이유 때문에 자신의 헌법적 권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만두도록 종용하는 것은 옳지 못함은 연방 법원도 여러 차례 천명한 바입니다. 강도는 벌하고 피해자는 보호하는 것이 사회가 할 일 아니던가요.


In your statement you assert that our actions, even though peaceful, must be condemned because they precipitate violence. But is this a logical assertion? Isn't this like condemning a robbed man because his possession of money precipitated the evil act of robbery? Isn't this like condemning Socrates because his unswerving commitment to truth and his philosophical inquiries precipitated the act by the misguided populace in which they made him drink hemlock? Isn't this like condemning Jesus because his unique God consciousness and never ceasing devotion to God's will precipitated the evil act of crucifixion? We must come to see that, as the federal courts have consistently affirmed, it is wrong to urge an individual to cease his efforts to gain his basic constitutional rights because the quest may precipitate violence. Society must protect the robbed and punish the robber.

 


백인 중도주의자들은 (소위 깨어 있는 온건한 시민들은), 자유권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과 관련하여 시기상조라는 프레임을 거부할 것이라는 내 믿음은 틀렸던 것 같습니다. 텍사스의 한 백인 동료 목회자(시민단체 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막 보내왔습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유색인종도 나중의 언젠가는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나, 당신은 지금 지나치게 성급하다. 지금에 도달하는 데도 기독교는 2천년이 걸렸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이 땅에서 실현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하지만 그러한 태도는 시간에 대한 슬프도록 잘못된 인식에서, 시간의 흐름이 결국 모든 악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묘하게 비이성적인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사실 시간 자체는 정의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시간은 쓰기에 따라 파괴적으로도 건설적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선의를 가진 이들보다 악의를 가진 이들이 시간을 더 효과적으로 잘 쓴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세대가 회개해야 하는 것은 악한 자들의 증오섞인 말들과 행동뿐만이 아니라 소위 선량한 이들의 소름끼칠듯한 침묵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발자취는 필연성의 바퀴 위에서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함께 추구해 나가고자 하는 이들의 쉴틈없는 노력을 통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나는 노력이 없다면, 시간 자체는 사회의 정체 및 퇴보와 한통속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정의로운 일을 하는 데 시의적절한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현실에 구현하고, 국가적 비극을 연대의식의 찬송으로 바꾸기에 적절한 시점은 바로 지금입니다. 인종차별의 사상누각이 대신 인간 존엄성의 반석 위에 국가 정책을 올려놓기에 가장 알맞은 시점도 나중이 아닌,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I had also hoped that the white moderate would reject the myth concerning time in relation to the struggle for freedom. I have just received a letter from a white brother in Texas. He writes: "All Christians know that the colored people will receive equal rights eventually, but it is possible that you are in too great a religious hurry. It has taken Christianity almost two thousand years to accomplish what it has. The teachings of Christ take time to come to earth." Such an attitude stems from a tragic misconception of time, from the strangely irrational notion that there is something in the very flow of time that will inevitably cure all ills. Actually, time itself is neutral; it can be used either destructively or constructively. More and more I feel that the people of ill will have used time much more effectively than have the people of good will. We will have to repent in this generation not merely for the hateful words and actions of the bad people but for the appalling silence of the good people. Human progress never rolls in on wheels of inevitability; it comes through the tireless efforts of men willing to be coworkers with God, and without this hard work, time itself becomes an ally of the forces of social stagnation. We must use time creatively, in the knowledge that the time is always ripe to do right.

Now is the time to make real the promise of democracy and transform our pending national elegy into a creative psalm of brotherhood. Now is the time to lift our national policy from the quicksand of racial injustice to the solid rock of human dig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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